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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4. 눈사람을 기다리며금요예찬 2021. 12. 7.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대학 기숙사는 사각형 모양으로 가운데에 중정이 있었다. 그곳은 기숙사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쉬이 볼 수 없는 비밀스러운 정원이었다. 4년 동안 동, 서, 남, 북향을 고루 오가며 그 기숙사에 살았는데 마지막 학기에 운 좋게 중정 쪽으로 창을 낸 방을 배정받았다. 방은 남향이라 해가 오래 들었고 창밖으로 중정이 내려다 보였다. 오후 세 시, 강의가 없으면 나는 기숙사 방에 앉아 라디오를 틀어 두고 이른 저녁노을 빛에 해바라기를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루시드 폴의 목소리는 평화롭기 그지없었고 노랗게 물든 중정은 바깥보다 한 박자 느리게 시간이 흘렀다. 가을은 잠깐이라 금세 겨울이 왔다. 그날 룸메이트와 나는 이불속에 파묻혀 잔뜩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크게 걱정할 것도, 당장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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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알람 32. 추운 나라에서 온 영화금요알람 2021. 12. 3. 08:00
#리바이어던 #램스 #윈터 슬립 다정한 구독자님께 안녕하세요. 큐레이터 Q입니다. 찬바람이 매서워졌습니다. 12월이 되니 공기에 겨울 향이 가득하네요. 두툼한 패딩에 누에고치처럼 몸을 구겨 넣고 길을 나섭니다. 요즘은 밖에서 항상 마스크를 끼니까 눈만 밖으로 내놓게 되잖아요. 지금 내 눈을 시리게 하는 이 얼음 같은 바람의 고향이 시베리아일지 오호츠크해일지 알 수가 없네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도 겨울이 배경인 영화들을 소개합니다. 차가운 바람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 거실을 얼려버릴 것만 같은, 멀리 추운 나라에서 온 영화들입니다. 리바이어던 (2014) 러시아로 먼저 떠나볼까요? 영화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의 전경을 비추며 시작하는데요, 수채화 그림처럼 아름다운 언덕에 덩그러니 홀로 집 한 채가 앉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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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3. 함박눈이 소리를 지우면금요예찬 2021. 12. 2. 20:52
금요알람 구독하기 📬 뉴스레터 발행일: 2021. 11. 30. *영화 『파고』, 『레버넌트』, 『윈드 리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글쓰기 수업에서 묘사할 때 오감을 동원하면 글이 훨씬 풍부해진다는 사실을 배운 이후로 어떤 장면을 기억할 때 최대한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버릇이 생겼다. 바다를 떠올리면 쏴아, 쏴아하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와 누군가는 비릿하다 표현하는 바다 내음을 함께 생각하고 숲을 떠올리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와 흙과 이끼 냄새를 생각하는 식이다. 그런데 설원을 떠올리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고요하고 때로는 적막하다. 완벽한 고요를 깨는 건 상상으로 나를 설원에 데려다 두고 걷기 시작할 때다. 익숙하지 않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푸슬푸슬하게 쌓인 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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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알람 31. 진실을 눈 속에 파묻고금요알람 2021. 11. 26. 08:00
#파고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윈드 리버 다정한 구독자님께 안녕하세요. 큐레이터 Q입니다. 이번 주에 눈 보셨나요? 잠시 흩날리다 말아서 첫눈을 보았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습니다. 아침에 커튼을 걷었는데 밤새 내린 눈에 하얗게 변한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 어찌 탄성을 내뱉지 않을 수 있을까요. 눈길을 헤치고 갈 출근길 걱정은 잠시 미뤄두자고요. 이번 주는 설원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 영화 세 편을 골랐습니다. 수북이 쌓인 눈 속에 진실을 파묻은 이들은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될까요? 파고 (1996) 코헨 형제는 제게 대하기 어려운 직장 동료 같았습니다. 그들의 영화는 분명 좋은 줄 알겠는데 마음 편히 보긴 힘든, 마냥 어려운 건 아닌데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닌 영화로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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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알람 30. 웨스 앤더슨의 정사각형금요알람 2021. 11. 19. 08:00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로얄 테넌바움 #다즐링 주식회사 다정한 구독자님께 안녕하세요. 큐레이터 Q입니다. 지난주 디즈니 플러스가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것까지 구독해야 할까 망설이다 어플을 실행했는데 웬걸, 왓챠와 넷플릭스에서 사라진 영화들이 모두 여기 와 있더군요. 그중에 단연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제부터 그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가 영화관에서 상영 중이기도 하고요. 앤더슨 감독은 독특한 미장센과 톡톡 튀는 캐릭터, 재기 발랄한 설정으로 유명하죠. 특히 좌우 대칭과 정사각형에 꼭 들어맞는 화면 구성은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그럼 저와 함께 '웨스 앤더슨 세상'으로 떠나 보실까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 저는 이 영화로 웨스 앤더슨 감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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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1. 계산기 너머금요예찬 2021. 11. 16.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화장대 아래에는 항상 주판이 있었다. 엄마는 가계부 사이에 주판을 끼워 화장대 밑에 보관하곤 하셨는데 나는 손을 뻗어 넣어 가계부 사이에 끼어 있는 주판을 끄집어 내서는 장난감 마냥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주판을 기차놀이하듯 굴리거나 주판알을 튕기며 가계부를 쓰는 엄마 흉내를 냈는데 정작 그것이 계산을 할 때 쓰는 도구인지는 몰랐다. 장난감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장난감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 놀았던 건 그저 엄마를 따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땐 어른들이 쓰는 물건은 모두 신기해 보이고 써보고 싶으니까 말이다. 반들반들한 나무와 주판알을 한꺼번에 튕길 때 나는 차르륵하는 소리도 좋았다. 주판은 엄마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엄마가 옥수수처럼 가지런히 매달린 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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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알람 29. 수학의 즐거움금요알람 2021. 11. 12. 08:00
#히든피겨스 #이미테이션 게임 #뷰티풀 마인드 다정한 구독자님께 안녕하세요. 큐레이터 Q입니다. 다음 주 목요일이 수능입니다. 해마다 수능 때면 유독 추위가 매서운데 날씨가 추울 때 수능을 보는 건지 수능날이라 추위가 더 맹렬한 건지 알 수 없네요. 부디 전국의 모든 수험생분들이 그간 준비한 실력을 모두 잘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학능력시험의 '수학'은 학문을 뜻하는 '수학(數學)'이 아니라 학업을 닦는다는 뜻의 '수학(修學)'이지만 갈고닦으며 정진한다는 점에서 둘은 쌍둥이처럼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이번 주 금요알람은 수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소개드려요. 세 영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히든 피겨스 (2016) 미국과 소련이 우주 탐사로 열을 올리던 1960년대, 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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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0. 탕웨이와 만추, 그리고 귀걸이금요예찬 2021. 11. 9.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백화점에서 액세서리 코너를 구경하다 귀걸이 한 쌍을 발견했다. 소라와 조개, 진주 모양으로 장식된 귀걸이는 얼핏 보면 장난감 같지만 다시 보면 세부 묘사가 무척이나 아름다워 흔히 볼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프랑스에서 수공예사가 손으로 한땀 한땀 만들었다는 그 귀걸이는 특이한 모양만큼이나 가격도 특별했다.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비싸지는 않지만 그 돈을 들여서 사는 게 과연 맞을까 하며 멈칫하게 되는 어정쩡한 액수. 잠시 고민하다 이럴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 “둘러보고 올게요”를 내밀고 코너를 빠져나왔다. 동행했던 친구가 백화점 할인 카드가 있다며 말했다. “사지 그래? 예쁘던데.” “예쁘긴 한데, 그 돈 주고 사긴 좀 그래. 금도 아닌데…” “하긴… 그렇기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