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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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7. 함께 다정히 늙어가길금요예찬 2021. 12. 28.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상냥한 구독자님께, 안녕하세요. 이번 시즌 마지막 『금요예찬』을 쓰고 있는 큐레이터 Q입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2021년도 벌써 마지막 주입니다. 9월에 시작한 『금요예찬』은 오늘 편지까지 포함하면 모두 열일곱 편이 됩니다. 처음 시작할 때 매주 『금요알람』 외에 추가로 글을 쓸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는데 휴재나 지각없이 시즌을 마무리해 마음이 놓입니다. 고백하자면 월요일 저녁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한 주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한번 쉬고 나면 영영 쉬고 싶어 질까 두려워 어찌어찌 글 한 편을 썼습니다. 예약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면 무사히 마감을 했다는 안도감과 글이라 부르기 민망한 무언가를 생산했다는 부끄러움이 동시에 몰려왔습니다. 다음번 글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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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6. 만다라를 그리는 수도승의 마음으로금요예찬 2021. 12. 21.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해마다 11월이 되면 비장한 자세로 캐럴 앨범을 찾아 듣는다. 지금부터 열심히 들어야 겨우 두 달을 들을 수 있다며. 좋은 음악은 언제 들어도 좋지만 캐럴을 한여름에 듣는 건 탄산이 다 빠져버린 미지근한 사이다를 마시는 것만큼이나 김 빠지고 미적지근한 일이라 때를 맞추어 열심히 듣는다. 올해는 노라 존스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여러 번 들었다. 재즈 싱어가 캐럴 앨범을 내는 건 으레 한 번은 거치는 관문처럼 보였는데 그녀는 데뷔한 지 20년이 다 되어서야 캐럴 앨범을 선보였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녀의 목소리는 편안하고 아름다웠고 그녀의 노래를 연말에 집중해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캐럴을 듣는 것으로 연말 맞이의 서막을 올리고 나면 트리플 J형인 나는 치밀하게 연말을 준비하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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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5.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금요예찬 2021. 12. 14.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내가 무척이나 애용하는 영화 추천 애플리케이션 “왓챠”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저장해 둘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별점을 매기는 부분 아래에 “보고싶어요”라는 버튼이 있는데 그 버튼을 누르면 “보고싶어요”라는 영화보관함에 해당 영화가 저장된다. 최근 본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의 지난 출연작을 찾아 “보고싶어요” 버튼을 누른다. 새롭게 알게 된 감독의 대표작을 찾았을 때도 같은 버튼을 누른다. 영화제나 각종 매체에서 화제가 된 영화를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 나의 “보고싶어요” 영화보관함에는 970편의 영화가 저장되어 있다. 970편. 현실감이 없는 숫자라 다시 한번 적어 본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영화를 한 편씩 본다고 해도 3년이 걸릴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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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2. 웨스 앤더슨의 핑크 상자와 멘들스 케이크금요예찬 2021. 12. 14. 00:30
금요알람 구독하기 📬 특정 음식으로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중 하나다. 나는 영화 제목을 들을 때마다 멘들스(Mendl’s)라는 가게 이름이 인쇄된 핑크색 상자와 그 속에 포장된 화려한 삼단 케이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멘들스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케이크를 납품하는데 호텔 로비 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 분)가 좋아하는 아가사(시얼샤 로넌 분)가 일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가사가 얼굴에 밀가루를 잔뜩 묻혀가며 케이크를 굽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맛보지도 못한 케이크가 더욱 달달하게 느껴졌다. 영화는 여러 시대와 화면 비를 널뛰며 100분 동안 숨 가쁘게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런 와중에 멘들스 케이크가 등장하는 절대적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물론 케이크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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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4. 눈사람을 기다리며금요예찬 2021. 12. 7.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대학 기숙사는 사각형 모양으로 가운데에 중정이 있었다. 그곳은 기숙사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쉬이 볼 수 없는 비밀스러운 정원이었다. 4년 동안 동, 서, 남, 북향을 고루 오가며 그 기숙사에 살았는데 마지막 학기에 운 좋게 중정 쪽으로 창을 낸 방을 배정받았다. 방은 남향이라 해가 오래 들었고 창밖으로 중정이 내려다 보였다. 오후 세 시, 강의가 없으면 나는 기숙사 방에 앉아 라디오를 틀어 두고 이른 저녁노을 빛에 해바라기를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루시드 폴의 목소리는 평화롭기 그지없었고 노랗게 물든 중정은 바깥보다 한 박자 느리게 시간이 흘렀다. 가을은 잠깐이라 금세 겨울이 왔다. 그날 룸메이트와 나는 이불속에 파묻혀 잔뜩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크게 걱정할 것도, 당장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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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3. 함박눈이 소리를 지우면금요예찬 2021. 12. 2. 20:52
금요알람 구독하기 📬 뉴스레터 발행일: 2021. 11. 30. *영화 『파고』, 『레버넌트』, 『윈드 리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글쓰기 수업에서 묘사할 때 오감을 동원하면 글이 훨씬 풍부해진다는 사실을 배운 이후로 어떤 장면을 기억할 때 최대한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버릇이 생겼다. 바다를 떠올리면 쏴아, 쏴아하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와 누군가는 비릿하다 표현하는 바다 내음을 함께 생각하고 숲을 떠올리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와 흙과 이끼 냄새를 생각하는 식이다. 그런데 설원을 떠올리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고요하고 때로는 적막하다. 완벽한 고요를 깨는 건 상상으로 나를 설원에 데려다 두고 걷기 시작할 때다. 익숙하지 않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푸슬푸슬하게 쌓인 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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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1. 계산기 너머금요예찬 2021. 11. 16.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화장대 아래에는 항상 주판이 있었다. 엄마는 가계부 사이에 주판을 끼워 화장대 밑에 보관하곤 하셨는데 나는 손을 뻗어 넣어 가계부 사이에 끼어 있는 주판을 끄집어 내서는 장난감 마냥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주판을 기차놀이하듯 굴리거나 주판알을 튕기며 가계부를 쓰는 엄마 흉내를 냈는데 정작 그것이 계산을 할 때 쓰는 도구인지는 몰랐다. 장난감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장난감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 놀았던 건 그저 엄마를 따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땐 어른들이 쓰는 물건은 모두 신기해 보이고 써보고 싶으니까 말이다. 반들반들한 나무와 주판알을 한꺼번에 튕길 때 나는 차르륵하는 소리도 좋았다. 주판은 엄마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엄마가 옥수수처럼 가지런히 매달린 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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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0. 탕웨이와 만추, 그리고 귀걸이금요예찬 2021. 11. 9.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백화점에서 액세서리 코너를 구경하다 귀걸이 한 쌍을 발견했다. 소라와 조개, 진주 모양으로 장식된 귀걸이는 얼핏 보면 장난감 같지만 다시 보면 세부 묘사가 무척이나 아름다워 흔히 볼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프랑스에서 수공예사가 손으로 한땀 한땀 만들었다는 그 귀걸이는 특이한 모양만큼이나 가격도 특별했다.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비싸지는 않지만 그 돈을 들여서 사는 게 과연 맞을까 하며 멈칫하게 되는 어정쩡한 액수. 잠시 고민하다 이럴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 “둘러보고 올게요”를 내밀고 코너를 빠져나왔다. 동행했던 친구가 백화점 할인 카드가 있다며 말했다. “사지 그래? 예쁘던데.” “예쁘긴 한데, 그 돈 주고 사긴 좀 그래. 금도 아닌데…” “하긴… 그렇기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