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금요예찬 15.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금요예찬 2021. 12. 14. 08:00

     

    금요알람 구독하기 📬

     

     

    내가 무척이나 애용하는 영화 추천 애플리케이션 “왓챠”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저장해 둘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별점을 매기는 부분 아래에 “보고싶어요”라는 버튼이 있는데 그 버튼을 누르면 “보고싶어요”라는 영화보관함에 해당 영화가 저장된다. 최근 본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의 지난 출연작을 찾아 “보고싶어요” 버튼을 누른다. 새롭게 알게 된 감독의 대표작을 찾았을 때도 같은 버튼을 누른다. 영화제나 각종 매체에서 화제가 된 영화를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 나의 “보고싶어요” 영화보관함에는 970편의 영화가 저장되어 있다.


    970편. 현실감이 없는 숫자라 다시 한번 적어 본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영화를 한 편씩 본다고 해도 3년이 걸릴 숫자다. 좀 더 현실적으로 가정해서 주말마다 두 편씩 본다면 기간은 10년으로 늘어난다. 그런데 두 가정 모두 아주 중요한 조건 하나가 필요하다. 처음 시작한 970편의 영화 목록에 새롭게 추가되는 영화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2년쯤 전에 영화보관함에 담긴 영화의 수가 600을 넘었을 때 그 숫자에 기가 질려 보관함을 통째로 비워낸 적이 있다. 영화에 눌려진 “보고싶어요” 버튼을 몽땅 다시 눌러서 보관함의 숫자를 0으로 만드는 데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어차피 다 보지도 못할 테니 마음의 부채로 남겨 두지 말고 그냥 아예 잊어버리자는 생각이었다. 그 행동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아주 무용한 일이 되어버렸는데 자가증식이라도 하는지 영화보관함의 숫자가 이전보다 더 커졌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의식적으로 보관함에 담긴 영화의 수를 줄여보려했다. 묵은 숙제를 해치우듯, 강호의 무림 고수를 찾아 도장깨기 하듯 전투력을 불태우며 목록을 줄여 나갔다. 줄여 나간 줄 알았다. 열심히 영화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보관함에 담긴 영화의 수는 처음보다 오히려 약간 늘어나 있었다. 숫자가 900을 넘기고 난 후부터는 그냥 숫자를 의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포자기, 해탈의 경지, 될 대로 돼라의 심정이었다.


    보관함 속 영화 목록을 훑어본다. 하도 여러 번 반복해 보아서 포스터만 보아도 이미 영화를 몇 번 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영화도 있고 생판 처음보는 영문모를 영화도 있다. 영화를 앱에서 제공하는 모든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 가나다 순으로, 오래된 순으로, 예상 평점이 높은 순으로, 평균 평점이 높은 순으로. 최근 상영 시간 순으로 영화를 나열하는 기능이 추가되었는데 내가 고객 센터에 문의한 내용이 반영된 것인지 같은 문의를 한 고객이 많았는 지 약간 궁금하다.


    그래서 내가 영화를 고르는 과정은 대략 이렇다. “보고싶어요” 보관함에 담긴 영화를 이런 저런 순으로 나열해 본다. 일단은 예상 평점이 높은 순으로, 영화를 보고 싶긴 한데 피곤한 날은 상영 시간이 짧은 순으로, 체력이 좀 된다 싶은 날은 반대로 상영 시간이 긴 순으로 나열한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구독 중인 OTT 플랫폼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확인한다. 그날그날 기분이나 날씨, 컨디션에 따라 제법 아래쪽까지 목록을 훑을 때도 있지만 영화를 고를 때 되도록 에너지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기적으로 서비스 종료 예정작을 확인하고 곧 볼 수 없게 될 영화를 우선적으로 보는 치밀함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 원기옥 모으듯 보고싶은 영화를 모으는 일도 나름 즐겁다. 아마 이 위시리스트는 굉장히 오랫동안 줄지 않을 것이다. 자매품으로 교보 문고 어플에 보고 싶은 책 목록도 있는데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볼거리를 쌓아 두는데 큰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상영 시간 긴 순으로 영화를 나열해보니 목록의 첫 번째 영화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해피 아워』로 러닝 타임이 5시간 28분이다. 내가 구독하는 영화 OTT 플랫폼 중에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없다. 다행이다.

     

    자화상, 자아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