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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2. 웨스 앤더슨의 핑크 상자와 멘들스 케이크금요예찬 2021. 12. 14. 00:30
특정 음식으로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중 하나다. 나는 영화 제목을 들을 때마다 멘들스(Mendl’s)라는 가게 이름이 인쇄된 핑크색 상자와 그 속에 포장된 화려한 삼단 케이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멘들스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케이크를 납품하는데 호텔 로비 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 분)가 좋아하는 아가사(시얼샤 로넌 분)가 일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가사가 얼굴에 밀가루를 잔뜩 묻혀가며 케이크를 굽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맛보지도 못한 케이크가 더욱 달달하게 느껴졌다.
영화는 여러 시대와 화면 비를 널뛰며 100분 동안 숨 가쁘게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런 와중에 멘들스 케이크가 등장하는 절대적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물론 케이크가 이야기에 중요한 매체로 사용되지만 재기 발랄함이 넘쳐나는 전체 이야기에 비하면 케이크가 특별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멘들스 케이크를 빼는 건 앙꼬 없는 찐빵처럼 허전하고 어이없는 일처럼 여겨지는데 아마도 핑크색으로 대표되는 영화의 전반적인 톤과 케이크의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져서 그런 것 같다.나는 마카롱을 볼 때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속 케이크가 떠올렸다. 영화를 보고 시간이 좀 지났을 때는 영화에서 본 디저트가 케이크인지 마카롱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사실 영화관에서 보고 언제부터인가 마카롱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최근에 왓챠에서 다시 보고 케이크인 줄 알았다. 멘들스의 핑크 상자 속에 마카롱이 들어 있다고 해도 어색할 것 같지는 않다. 둘이 만드는 과정도 비슷하고 말이다.
마카롱은 앙증맞은 크기와는 달리 전혀 앙증맞지 않은 가격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디저트다. 아몬드 가루로 꼬끄를 굽고 그 사이에 필링을 채워 만드는데 단순한 생김새와는 달리 맛있는 꼬끄를 만드는 일이 무척이나 까다롭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다 저렴한 가격의 마카롱을 보고 신기해서 사보면 찐득한 꼬끄에 실망하고 만다. 내가 맛본 최고의 마카롱은 파리의 유명 베이커리도, 백화점에 입점한 디저트 가게도 아닌 학교 앞 수제 초콜릿 가게에서 판매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렇게만 쓰면 우울해 보이는데 사장님의 파티시에 능력을 알아본 손님들이 많았는지 가게를 시내로 확장 이전했다는 훈훈한 후문이다.달달한 탄수화물이 주는 말초적인 기쁨은 위력이 대단하다. “인생이 불행하게 느껴진다면, 탄수화물이 부족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전설적인 호텔리어 무슈 구스타보가 뜻하지 않은 일로 고난에 처하고 험난한 모험을 떠날 때 달콤한 케이크가 함께 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입안을 가득 달콤함으로 채우고 슬픔을 함께 집어삼킨다. 그게 마카롱이든 케이크든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멘들스의 케이크가 실제로 어떤 맛일지 궁금했는데 그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영화사에서 공식 레시피를 공개했다. 슈를 세 가지 크기로 굽고 초콜릿 필링을 가득 채운 후 삼층으로 쌓아 장식으로 마무리한다. 손이 많이 가고 쉽지 않아 보이지만 언젠가 한번 따라 해보고 싶은 레시피이다.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중 '금요예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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