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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13. 함박눈이 소리를 지우면금요예찬 2021. 12. 2. 20:52
뉴스레터 발행일: 2021. 11. 30.
*영화 『파고』, 『레버넌트』, 『윈드 리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글쓰기 수업에서 묘사할 때 오감을 동원하면 글이 훨씬 풍부해진다는 사실을 배운 이후로 어떤 장면을 기억할 때 최대한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버릇이 생겼다. 바다를 떠올리면 쏴아, 쏴아하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와 누군가는 비릿하다 표현하는 바다 내음을 함께 생각하고 숲을 떠올리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와 흙과 이끼 냄새를 생각하는 식이다. 그런데 설원을 떠올리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고요하고 때로는 적막하다.
완벽한 고요를 깨는 건 상상으로 나를 설원에 데려다 두고 걷기 시작할 때다. 익숙하지 않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푸슬푸슬하게 쌓인 눈이 몸무게에 눌려 아래로 가라앉으며 마찰음을 내고 추위를 막으려 칭칭 감은 목도리는 거친 숨소리를 증폭한다. 땅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진 설원에는 오직 내가 내는 소리만 있다.
눈과 고요함을 연결 지을 때마다 눈송이가 공기 중에 떠다니던 소리 입자를 몽땅 바닥에 가라 앉혀 눈 속에 묻어버리는 상상을 한다. 밤새 눈이 온 다음날 아침, 드물고도 짧게 찾아온 도시의 고요가 눈송이가 소리 입자를 제 무리 속에 가둔 덕이라 생각해 보는 거다. 공기는 소리 입자를 잃어 평소보다 성기게 비어버렸고 전달 매개체를 잃어버린 소리는 제가 태어난 자리에서 힘없이 메아리 칠 뿐이다. 전달되지 못한 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그곳에서 소멸하는데 이런 상상을 하고 있노라면 어쩐지 쓸쓸하고 공허한 마음이 들곤 한다.
눈이 만드는 적막감에 미혹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많은 영화에서 눈을 고독과 단절, 덧없음의 정서를 구축하는 데 사용하곤 한다. 영화 『파고』나 『레버넌트』, 『윈드 리버』의 배경이 설원이 아니라 사막이었다면 지금과는 영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흰색 눈밭에서 핏자국은 더욱 선명하고 또 내리는 눈에 쉽게 지워져 그만큼 더 허망하다. 참혹한 범죄의 흔적도, 처절한 탈출의 발버둥도 눈은 모두 제 속에 묻어버린 채 그저 침묵한다.
침묵을 깨는 건 결국 사람이다. 『파고』에서 마지 건더슨(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은 눈 덮인 도시를 오가며 살인자를 추적하고, 『레버넌트』와 『윈드 리버』에서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와 코리 램버트(제레미 러너 분)는 각자의 복수를 위해 눈 위를 걷는다. 눈으로 흐려진 자취를 어렵사리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코 끝과 양볼도 냉기로 얼어붙는다.
모든 일이 끝나고 건더슨은 퇴근 후 침대에서 남편과 텔레비전을 보고, 글래스는 숲에서 죽은 아내를 만나고, 램버트는 친구와 함께 딸들이 놀던 그네를 등지고 앉아 오지 않을 딸을 기다린다.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금요예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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