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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요예찬9. F55 포레스트, 영창 피아노
    금요예찬 2021. 11. 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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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가 갑자기 요즘 피아노를 한 대 사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궁금해져서 검색해보았다. 피아노는 모양에 따라 크게 그랜드 피아노와 업라이트 피아노로 나누는데 공연장에서 볼 수 있는 뚜껑이 열리는 피아노가 그랜드 피아노이고 피아노 학원 연습실에서 흔히 보는 세로로 길쭉한 피아노가 업라이트 피아노다. 그랜드 피아노는 1억이 훌쩍 넘어간다는 이야기를 예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애초에 가격을 찾아보지도 않았고 업라이트 피아노는 삼백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실제 가격은 생각을 훨씬 웃돌았다. 국내 피아노 브랜드의 대명사인 영창과 삼익, 일본의 대중적인 악기 브랜드인 야마하에서 생산하는 업라이트 피아노는 오백만 원 전후였다. 물론 천만 원이 넘어가는 모델도 있었지만 원래 악기란 가격을 위로 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은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전공자가 아니라 취미로 피아노를 배우는데 새 악기를 집에 들여놓고 싶다고 생각하면 예산을 오백만 원 정도는 잡아야 하는 거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피아노 가격이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피아노를 사야겠다는 마음이 든 적도 없었다. 살 마음이 없으니 가격이 얼마인지도 당연히 궁금하지 않았다. 피아노는 늘상 그냥 집에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 집에는 항상 피아노가 있었다. 엄마는 내가 두 살인가 세 살 때 중고로 오십만 원을 주고 피아노를 샀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은 많을 피아노와 함께 자랐다. 텔레비전과 장롱이 수명을 다해 집을 떠나가도 피아노만은 꿋꿋하게 남아 험난한 가족 대이동의 여정을 함께 했다. 피아노 표면은 흑단처럼 검고 반질반질해서 얼굴이 비춰 보였고 아주 어렸을 때는 건반 아래쪽으로 기어 들어가 페달 위에 앉아서 혼자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피아노 의자 아래에 숨기도 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구석이나 상자처럼 작은 공간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피아노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면서도 어딘가 짐스러운 물건이다. 짐스럽다 함은 비유적인 게 아니라 정말로 물리적인 짐을 의미한다.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 집은 열 번 넘게 이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피아노가 육중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악기가 상하지 않게 잘 싸야 했음은 기본이요, 자리를 옮길 때마다 틀어진 음정을 바로잡기 위해 조율사를 불러야 했다. 조율사 아저씨는 팔에 토시를 끼고 피아노를 열어젖혀 평소에 볼일 없는 피아노의 비밀스러운 속살을 드러낸 채 88개나 되는 건반을 하나하나 두들겨가며 음정을 맞추었다. 오후 내내 조율을 하고 우리 가족과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고 있던 조율사의 연락처도 사라지고 나중에는 조율 가격도 많이 올라서 악기에게 제대로 된 소리를 찾아주지 못한 채 세월만 흘렀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훨씬 많기도 했다.

    거의 평생을 함께한 피아노의 제조사와 모델명을 정확히 알게 된 건 이제 더는 이삿짐에 피아노를 꾸릴 수 없다는 엄마의 선포가 있고 난 후 중고로 피아노를 팔 때였다. 피아노 학원에서 보던 피아노에는 건반 위 피아노 뚜껑에 ‘영창’이나 ‘삼익’이 알파벳으로 쓰여 있었던 반면 우리 집 피아노는 “FOREST”라고 새겨져 있었다. 대체 이 피아노는 어느 브랜드에서 만든 건가 궁금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제대로 알아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종종 가까운 것을 소홀히 대하곤 한다. 피아노를 가지러 집에 들른 중고 악기상 주인분은 이 피아노가 영창에서 수출을 목적으로 만든 “F55 포레스트” 피아노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악기의 매입가로 팔 만원을 제시했다. 요즘은 피아노 수요가 예전처럼 많지 않아서 중고 매입가가 낮을 수밖에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피아노를 치며 즐거웠던 순간, 악보를 익히기 위해 들였던 노력, 알게 모르게 정들었던 시간을 단돈 팔만 원에 퉁치자니 갑자기 아까운 마음이 들어 그냥 가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악기상 아저씨는 내 얼굴과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예전에는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적금을 부어가며 피아노를 샀기 때문에 중고로 팔면서 많이들 서운해한다고, 우리가 피아노와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잠깐의 말미를 주었다. 트럭에 실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피아노를 베란다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나를 구성하는 작은 조각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 찾아왔다.

    제인 케이틀의 영화 『피아노』에서 에이다(홀리 헌트 분)는 결혼을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뉴질랜드로 떠나는 바닷길에 자신의 피아노를 가져간다. 피아노는 거친 파도와 소금기 가득한 바다 바람을 그대로 맞고 짐 옮기는 인부들은 시체라도 들었냐며 험하게 피아노를 다룬다. 그 장면을 보는 내내 저렇게 시달린 피아노가 멀쩡할 리 없지 싶어 애가 쓰였다. 급기야 남편 될 사람은 여러 이유를 들며 피아노를 해안에 버려두고 가는데 에이다는 말도 못 하고 떠나는 길에 절벽 위에 서서 자신의 피아노를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한다. 당장 가져 가진 못하더라도 바닷물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옮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고스란히 파도를 맞고 있는 피아노를 보니 상처에 바닷물이 닿은 듯 쓰라렸다.

    종종 내 피아노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생각한다. 평생 집에만 있었으니 이번에는 넓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리를 뽐내고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름처럼 숲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사랑받고 사랑하고 있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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