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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글과 뉴욕
재료: 밀가루, 설탕, 소금, 이스트
뉴욕에 한 달만 살아보면 좋겠다고 종종 생각한다. 길게도 짧게도 말고 딱 한 달만. 그보다 오래 머물기에는 사람도 차도 너무 많고 물가도 비싸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칠 것 같고 한 달보다 짧은 시간은 뉴욕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에 너무 모자랄 것 같다. 센트럴 파크를 걷고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머무는 동안 오페라나 연주회를 보려면 한 달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한다. 아마도 근시일 내에는 이루기 어려운 계획이라 그저 상상에만 머문다.
처음 뉴욕을 여행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가이드를 따라 바쁘게 주요 랜드마크를 돌아다녔다. 화면으로만 보던 뉴욕의 마천루와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일은 신났고 대규모 박물관과 미술관도 흥미로웠지만 거기까지였다. 거리를 걷는 뉴욕 사람들은 다들 너무 바쁘고 차가워 보였고 서부와 달리 동부의 하늘은 늘 잿빛에 가까웠다. 차도 많고 도로도 복잡했다. 그냥 화면으로 볼 때가 더 좋았다고 아직 뭘 모르는 어린 나는 뉴욕을 영 정이 가지 않는 도시로 기억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뉴욕의 얼굴을 접했다. 뉴욕만큼 영화나 드라마, 음악의 배경이나 소재로 등장하는 도시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뉴욕은 어디 선가 불쑥 나타났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친구들과 걷는 길이 궁금해지고 스파이더 맨이 거미줄로 사랑의 메시지를 쏘았던 브루클린 다리를 직접 보고 싶어졌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나선에 몸을 맡긴 채 작품을 감상하고 영화 “렌트”에서 주인공들이 탔던 거칠게 낡은 뉴욕 지하철에 탑승할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디선가 베이글이 뉴욕의 상징과도 같은 빵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로는 베이글을 볼 때마다 뉴욕을 떠올렸다. 19세기.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뉴욕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베이글도 함께 대서양을 건넜다. 뉴욕에 자리 잡은 유대인들은 베이글을 만들고 먹고 팔았다. 저렴한 가격에 고열량 식품이라 간편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금세 널리 퍼졌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결코 저렴한 가격이 아니었지만,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추가하면 웬만한 밥 한끼와 맞먹는 가격이 되어버렸지만 쫄깃한 빵의 식감과 녹진한 크림치즈가 어우러져 내는 맛이 좋아서 아침 대용으로 자주 사 먹었다. 반으로 가른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으면 브런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스스로를 대접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시 뉴욕을 방문했을 때는 일정이 너무 짧았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올린 로망을 풀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뉴욕을 베이글 하나 사 먹지 못하고 떠났다.
두 번의 뉴욕 여행은 두 번 모두 각기 아쉬웠지만 베이글은 항상 먹을 때마다 제 몫을 했다. 의외로 어느 곳에서 사든 일정 수준 이상의 맛을 보장하는 빵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베이글은 애초에 파는 곳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보일 때마다 사 먹어도 맛이 괜찮았다. 하지만 크기나 양에 비해 좀 비싼 감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베이글을 대형 할인마트에서 봉지 단위로 사면 훨씬 싸다는 정보를 전했다. 기회를 놓칠 새라 함께 마트로 향했다. 매대에는 듣던 대로 여러 종류의 베이글이 줄지어 정렬되어 있었고 가격도 저렴했다. 어떤 맛으로 고를까 매대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플레인이 먹기에는 가장 무난하겠지. 아니야, 블루베리가 있는 게 더 맛있 을거야. 달달하니까 따로 크림치즈를 바르지 않아도 되고. 바르면 물론 더 맛있겠지만. 내적 갈등을 한창 벌이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빵 봉지를 집어 들어 카트에 툭 옮겨 담는 순간, 낯선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건넸다. 사실 빵 봉지를 고르는 내내 낯선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지던 터였다. 흡사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낮은 목소리. 아무도 알면 안 되는 비밀을 공유하는 듯 은밀한 톤으로 그가 말했다.
“그 빵, 맛없어.”
내가 미처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자신의 할 말만 남기고 표표히 자리를 떠났다. 혹여라도 맛없는 빵을, 그것도 열두 개나 들어있는 봉지를 고를까 계속 지켜보다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속삭인 거였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셨는데 모자를 곱게 쓴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그의 친절에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저 서 있었다.
그날 이후로 베이글을 볼 때마다 뉴욕과 함께 얼굴 없는 목소리가 함께 떠오른다. 맛없는 빵이라. 그 맛없는 빵을 사실 제가 좋아한답니다. 당신도 이 빵의 숨은 매력을 함께 즐기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금요알람 구독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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