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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명쾌한 주문
    금요선빵 2022. 6. 14. 00:02

    토르티야와 샌안토니오

    재료: 옥수수 가루 또는 밀가루, 소금, 물

    텍스-멕스(Tex-Mex)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감이 좋아서 혼자 여러 번 중얼거렸다. 텍스-멕스(Tex-Mex), 텍스-맥스(Tex-Max), 택스-맥스(Tax-Max). 엑스 발음이 두 번 겹쳐 반복되며 발음할 때마다 경쾌한 리듬을 만드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E’를 ‘A’로 바꾸면 금세 엉뚱한 뜻으로 변하는 점이 재미있었다.


    텍스-멕스는 텍사스와 멕시코에서 앞자리를 따와 만든 합성어로 미국식 멕시코 음식을 일컫는 말이다. 텍사스와 멕시코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텍사스는 예전에 멕시코 영토이기도했으며 히스패닉 인구 비율도 높다. 그러니 이곳에서 텍스-멕스라는 새로운 음식 장르가 생기는 건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멕시코를 뜻하는 멕스(Mex)를 최대를 뜻하는 맥스(Max)로 바꾸어 생각하게 된 건 주문 후 식탁 위로 도착한 음식을 보고 난 후였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어마어마하게 푸짐한 양. 한 손으로 들기 무거울 정도로 커다란 음료수 잔. 저건 분명 1인분이 아닐 거야 싶은 양. 


    어떤 텍스-멕스 음식이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토르티야다. 밀전병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만드는 방법도, 맛도 비슷하다. 물에 옥수수 가루나 밀가루를 풀고 소금으로 간을 한 반죽을 프라이팬에 부쳐 만든다. 본디 옥수수 가루로 만들었는데 미국으로 멕시코 음식이 전해지면서 밀가루로 만든 토르티야가 생겨 났다. 


    토르티야 자체는 별다른 맛이 없지만 무엇과 함께 먹느냐에 따라 다양한 음식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토르티야에 고기나 채소, 치즈를 다져 넣고 오븐에서 구우면 퀘사디아나 엔칠라다가, 그냥 싸 먹으면 타코나 파히타가, 토르티야를 사등분으로 자르고 기름에 튀긴 후 녹인 치즈를 부으면 나초가 된다. 미리 만든 토르티야를 냉동으로 팔기도 해서 집에서 간단히 먹기도 좋다. 토르티야를 보면 구절판 한가운데 있는 밀전병이나 냉동 만두피가 떠오르는데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 음식과 비슷한 음식을 오래전부터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애럴린 보몬트(Aralyn Beaumont)는 납작한 빵에 고기를 싸 먹는 인류 보편적 문화를 이야기하며 토르티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인류가 토르티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닉스타말화 기술로 옥수수 속에 든 독소를 낮추고 옥수수 껍질을 쉽게 제거할 수 있게 된 기원전 700년 이후다. 어떻게 아즈텍인들이 옥수수를 알칼리 용액에 담글 생각을 했는지는, 그렇게 해서 낟알을 쉽게 으깨고, 조리 시간을 단축하고, 더 오래 저장하고, 영양가를 높일 수 있었는지는 역사학자들조차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기원전 300년, 토르티야는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음식이었다. ‘토르티야’라는 말은 16세기 멕시코 해안에 도착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작은 케이크’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했다. 돌이켜보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요리인데도 의미가 많이 축소된 셈이다.
    - 애럴린 보몬트, 모두가 납작한 빵에 고기를 싸 먹는다. 『음식의 말』 (윌북)에 수록.


    샌안토니오에서 일주일을 머무르는 동안 원 없이 텍스-멕스를 먹었다. 그 해에 먹을 멕시코 요리를 다 먹은 기분이었다. 샌안토니오에는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샌안토니오 강을 따라 카페와 식당이 줄지어 있는데 대부분 가게에서 텍스-멕스 메뉴를 팔았다. 샌안토니오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익숙지 않은 메뉴 판을 들고 무엇을 주문하면 좋을까 고심했다. 바로 그때 옆 테이블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치직, 치직, 치지직. 아직 열기가 가지 않은 뜨거운 무쇠 접시 위에서 음식이 익어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소리만큼 냄새도 엄청났다. 접시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고 맛있는 냄새가 공기에 실려 전해왔다. 저것이다. 저것을 꼭 주문해야겠다. 


    웨이터가 우리 테이블에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말할 문장을 머릿속으로 골랐다. 옆 테이블에서 주문한 저 음식과 같은 것으로 주세요. 그러나 나의 말보다 친구의 몸이 한발 빨랐다. 친구는 현란한 의성어와 몸짓으로 우리가 주문하고자 했던 메뉴를 아주 정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했고 웨이터는 매우 능숙하게 해당 메뉴를 주문받았다. 나는 잠시 얼이 빠졌다가 이내 웃고 말았다. 그래도 명색이 박사 과정에, 우리가 영어를 배우고 쓴 세월이 있는데 이렇게 원색적으로 표현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가 아니다, 네가 최고다 싶었다.


    매사가 그랬다. 내가 아득히 여기는 일을 그는 무던히 해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은 검게 타들어 갔을 게다.) 같은 일을 두고도 옆에서 보았을 때 힘들어 죽을 듯이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힘든 티 내지 않고 일을 해치우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후자에 속했다. 박사 프로포잘도, 졸업도, 결혼도, 취직도, 이직도.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 보였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어도, 별일 아니라는 듯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성큼성큼 가던 길을 걸어갈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과 고달팠던 대학원 과정을 함께 보낼 수 있어 나는 참으로 복되고 든든했다.


    멕시코 음식을 볼 때마다 친구의 호탕한 주문이 떠오른다. 정작 그 이후로 그 친구와 멕시코 요리를 먹어본 적은 없다. 조만간 함께 멕시코 식당에 가야겠다. 이번에는 또 어떤 명쾌한 주문을 선보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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