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크렘슈니타가 데려간 길금요선빵 2022. 5. 24. 09:00
: 크렘슈니타와 사모보르
재료: 밀가루, 계란, 설탕, 바닐라, 럼, 우유, 커스터드 크림
자그레브 시에서 발행한 여행안내 책자에는 당일 치기로 다녀오기 좋은 근교 도시 몇 곳이 소개되어 있었다. 소책자는 놀랍게도 한국어판을 제공했다. 발칸 반도의 작은 나라에서 발행한 관광 책자가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쓰는 언어로 발행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을까 궁금해졌다. 다시 말해, 대체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크로아티아를 찾길래 한국어판 관광책자가 나오게 된 걸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크로아티아는 우리나라에서 그리 인기 있는 관광지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직항도 생기고 이렇게 한국어 관광안내문도 나오는 걸 보면 새삼 미디어의 영향력이 엄청나다 싶었다.
덕분에 한국어로 쓰인 안내문을 편하게 읽으며 어디를 가보면 좋을까 책장을 뒤적거리다 ‘사모보르(Samobor)’라는 도시를 발견했다. 자그레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다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로 자그레브 사람들이 주말에 즐겨 찾는 근교 여행지라고 했다. 자그레브에서 사모보르까지는 버스로 40분. 평일 오후 나절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이는 흔치 않는지 버스터미널도 사모보르행 버스도 한산했다.
책자에 소개된 여러 도시 중 굳이 사모보르에 가보기로 마음먹은 건 “크렘슈니타 (Kremšnita)”라는 빵 사진 탓이 컸다. 정확히는 케이크인데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 디저트로 사모보르에 간다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고 했다. 사실 별다른 설명 없이 사진으로만 보아도 달콤한 향기와 부드럽고 폭신한 식감이 전해져 왔다. 그래, 너로 정했다.
크렘슈니타는 중부 유럽과 발칸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디저트다. 각 나라마다 크렘슈니체, 크렘슈니타, 크레메시 등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냥 크림 케이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퍼프 페이스트리 사이에 커스터드 크림과 휘핑 크림을 채워 만드는데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잘라낸 후 상단에 슈가 파우더를 뿌려 마무리한다. 사모보르의 크렘슈니타는 커스터드 크림 함량이 높은 것이 특징인데 오랜 커스터드 크림 덕후로서 이 디저트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었다.
버스가 사모보르에 도착했다. 정류장 근처에는 조그만 장터가 있어 장을 보는 사람들로 조금 붐볐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실개천이 졸졸 흐르며 이방인을 맞았고, 곧이어 자그마한 동네가 나왔다. 광장도 아담해서 주변에 위치한 가게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에 슬쩍 섞여 들어가 광장을 조금 걷다가 크렘슈니타 그림을 커다랗게 내건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진열장에는 앙증맞은 조각 케이크들이 줄지어 앉아 나를 반겼다. 크렘슈니타를 먹으러 왔건만, 그들의 자태에 매료되어 메뉴를 고르는 일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한참을 고민하다 커피 한잔, 크렘슈니타 하나, 그리고 욕심을 조금 부려 조각 케이크 하나를 주문했다. 포크로 크게 한입을 떠먹었다. 진한 커스터드 크림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몽실몽실한 퍼프 페이스트리의 맛도 좋았다. 상상할 수 있는 달콤함과 부드러움이었고 상상한 만큼 알맞게 맛있어서 행복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커피를 주문하면 항상 물 한잔을 함께 내주었는데 케이크와 커피, 물을 오가며 달달함을 만끽했다.
잠시 눈을 돌려 사람들을 구경했다. 카페 안에는 나처럼 홀로 디저트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창가에는 오래된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커피와 케이크를 먹는 중이었고 반대쪽에는 중년의 여성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혼자 오지 않았다면 미처 보지 못했을 장면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도 좋지만 혼자라서 좋은 여행도 있다. 사모보르를 홀로 걸으며 혼자였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썰매를 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젊은 아빠. 엄마 손을 잡고 하교 중인 여자애. 함께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이좋은 동네 친구 셋. 어느 집 창가에 놓인 꽃병들. 담장 너머에 커다란 개 한 마리. 쌓인 눈을 뭉쳐가며 노는 아이들.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모보르 출신의 시인 동상. 그리고 이 모두를 따스하게 비추던 오후 햇살. 크렘슈니타의 달콤함을 입에 머금고 소박한 동네 길을 따라 걸으며 이 모든 장면을 놓칠 새라 천천히 걸었다. 언제고 이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금요선빵'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 명쾌한 주문 (0) 2022.06.14 13. 후반쉼표 (0) 2022.06.02 11. 테슬라와 함께 조각 케이크를 (0) 2022.05.17 10. 긴 칼 손에 들고 호밀빵을 자르면 (0) 2022.05.10 09. 한량 마냥 느긋이 브뢰첸을 씹던 아침 (0) 2022.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