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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긴 칼 손에 들고 호밀빵을 자르면
    금요선빵 2022. 5. 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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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밀빵과 그린델발트

    재료:
    호밀,
    호밀스타터,
    물,
    소금

    “빵이 밥이 되나!”

    아빠의 밥 먹었냐는 질문에 빵 먹었다고 대답을 하면 백이면 백, 돌아오는 문장이다. 아무리 맛있는 빵을 배 부르도록 먹었더라도 빵은 빵일 뿐, 끼니를 대신할 수 없다는 이론은 단단하기가 설악산 울산 바위 같다. 휴일 점심 한 끼 정도는 프렌치토스트나 샌드위치로 가볍게 때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은데 그렇게 먹은 빵은 애피타이저 내지는 간식일 뿐 식사는 아니다. 어째서 빵은 끼니가 될 수 없는 것 인가! 서양 사람들은 주식이 빵이라며 볼멘소리를 하면 또다시 무적의 논리가 되돌아온다.

    “우째 빵이 밥이 되노!”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때로는 귀찮아서 종종 빵으로 밥을 대신하곤 했다. 그때는 스스로를 잘 대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지금보다 더 몰랐고 그래서 끼니를 대충 먹었다. 밥 대신 빵을 먹는 행위는 정갈히 차려 먹는 식사보다는 가볍게 한 끼를 때우는 것에 가깝다. 때운다는 표현이 벌써 대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럴 때마다 아빠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리는 듯했다.

    유럽에서 머무는 동안은 빵을 끼니로 먹으면서도 죄책감 없이 당당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고, 이곳은 빵이 주식인 곳이니 나도 빵을 밥처럼 먹는 일이 자연스러운 거였다. 매 끼니마다 모양도 재료도 다양한 식사용 빵을 보고 씹고 뜯고 즐겼다.

    호밀빵은 식사 때 가장 흔히 만났던 빵이었다. 시큼한 맛과 폭신한 질감이 술떡과 비슷한데 그보다는 맛도 색도 조금 더 거칠다. 알프스 하이킹을 앞두고 머물렀던 그린델발트 근처 숙소에서도 아침으로 호밀빵이 나왔다. 

    숙소에 딸린 자그마한 식당이 참 예뻤다. 앙증맞은 테이블은 하얀 식탁보로 덮여 있고 레이스 달린 커튼 너머로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뛰어다닐 듯한 풍광이 보였다. 식당 인테리어를 정말로 스위스 전통식으로 꾸며 둔 것인지 아니면 관광객이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스위스식 인테리어의 로망을 역으로 실현한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쨌든 동화같이 예쁜 식당에는 호밀빵이 덩어리 째 준비되어 있었는데 자기가 먹을 만큼 직접 썰어 먹는 식이었다. 

    호밀빵은 세로로 긴 구멍이 숭숭 난 도마 위에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하얀 면포가 덮여 있었다. 칼질을 하면서 생긴 빵 부스러기가 도마 구멍으로 떨어져 편리했다. 흰 천은 빵을 썰지 않을 때는 덮어 두는 용도로, 칼질을 하는 동안은 직접 빵을 만지지 않고 빵을 잡을 수 있도록 겉표면을 두르는 용도로 사용했다. 보통 이런 세팅은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준비되기 때문에 나는 빵을 180도 돌려놓았다. 생각보다 호밀빵은 묵직했다. 기다란 빵칼을 슥슥 놀려 빵을 자르는 몸놀림이 즐거웠다.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며 호밀빵을 꼭꼭 씹어 먹었다. 시큼한 첫맛을 지나 고소한 맛, 곡물 특유의 단맛이 느껴졌다. 호밀빵에 치즈와 햄, 계란 요리와 샐러드를 곁들여 먹었다. 이게 식사가 아니라면 무엇이 식사라 말인가!

    빵이 간식 취급을 당하는 건 아마도 단맛 때문인 것 같다. 단맛은 주로 과자에서 나는 맛이니까 빵은 주식보다 간식으로 분류되는 거다. 소보루빵이나 단팥빵처럼 우리나라 빵집에서 흔히 파는 빵은 기본적으로 단맛이 들어가 있다. 버터도 많이 들어가서 기름지다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식사용 빵은 전혀 다르다. 레시피에 버터나 설탕도 들어가지 않고 밀가루와 물, 소금을 섞고 효모의 도움을 받아 발효과정을 거쳐 만든다. 그렇게 밥처럼 심심한 빵이 완성된다. 

    요즘은 식사용 빵을 파는 빵집이 우리나라에도 많아졌다. 집집마다 다채로운 맛과 모양으로 구워낸 호밀빵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는 쉽지 않다. 두 손 묵직한 호밀빵 한 덩이를 사 와 도마 위에 두고 신나게 손을 놀린다. 슥슥슥. 빵칼이 호밀빵을 스치는 소리가 흥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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