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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테슬라와 함께 조각 케이크를금요선빵 2022. 5. 17. 09:00
조각 케이크와 자그레브
재료: 불명
자그레브는 동상의 도시였다. 도시를 걷다 멈추는 어디든 동상이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높은 기단 위로 위풍당당이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정치가가, 시장 입구에는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서있는 아낙네가, 언덕 위 벤치에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자리를 지켰다. 광장의 동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동상이 큰 위압감 없이 그저 행인 한 사람처럼 무심히 거리에 서 있어 마음만 먹으면 그들과 악수를 하거나 어깨동무를 두를 수도 있었다. 소박한 자세로 바닥부터 뿌리를 박고 선 동상이 거리를 오가는 크로아티아 사람들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도시의 거리를 헤매는 동양의 이방인에게 무뚝뚝한 얼굴로 선한 친절을 베풀던 큰 키의 크로아티아 사람들을.도시를 거닐며 마주친 동상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니콜라 테슬라의 동상이었다. 보도와 차도가 교차하는 지점에 왼손으로 턱을 괴고 다리를 쭈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 테슬라의 동상이 있었다. 발치에는 누군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화환을 가져다 두었다. 다음날인가 다시 동상을 지날 때 보니 화환은 마치 월계관처럼 테슬라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지금이야 일론 머스크의 전기차 브랜드 덕에 “테슬라”라는 이름이 무척 친숙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의 지명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이과 전공, 그중에서도 전자공학을 전공한 사람 정도나 알지 않았을까. 물리 시간에 교류를 배우면서 테슬라의 이름을 필연적으로 접하지만 처음 배우는 교류의 개념과 이를 설명하는 방정식에 애를 먹다 보면 테슬라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허겁지겁 지식을 습득하는데 급급해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기를 공급하는 방식을 두고 직류의 에디슨과 교류의 테슬라가 한판 승부를 벌였던 실화를 바탕으로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니콜라스 홀트를 각각 에디슨과 테슬라로 캐스팅한 영화 “커런트 워”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자그레브 도시 한복판에서 뜬금없이 테슬라의 동상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가 사람으로 다가왔다. 동상을 바라보며 십 년 넘게 책 속에서 납작하게 눌려 있던 니콜라 테슬라의 초상에 부피감이 생겼다. 살아 있지 않은 동상을 보고서야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보였다. 그에게도 고향이 있었다.
테슬라는 1856년 크로아티아 리카 지방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등에서 보내다 188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1943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지금 자그레브에 있는 동상은 크로아티아 조각가 이반 메스트로비치(Ivan Meštrović)의 작품이다. 둘은 1924년 뉴욕에서 만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덕분에 2019년의 내가 자그레브 도시 어느 거리에서 테슬라의 동상을 만날 수 있었다.
자그레브에서 보낸 마지막 날은 아침부터 비가 오다 말다 했다. 도시를 떠나기 전 테슬라의 동상이 한번 더 보고 싶어 그를 찾았다. 괜스레 애잔한 마음이 들어 동상 주변을 서성였다. 자그레브 사람들과 함께 테슬라는 비를 맞았다 말았다 했다.
테슬라를 뒤로 하고 십 분 정도 걸었더니 자그레브 성당이 나왔다. 성당 맞은편의 작은 카페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따뜻한 차 한 잔과 조각 케이크를 주문했다. 특별히 그윽한 차나 맛있는 케이크는 아니었지만 겨울비에 언 몸을 데우기에는 충분했다. 무언가 하나 살 때마다 속으로 깜짝깜짝 놀라고 말았던 두브로브니크의 물가에 비하면 자그레브의 물가는 착한 편이어서 디저트 한상을 차려 놓고 먹는 호사를 누렸다.
창 밖으로 자그레브 성당이 보였다. 문득 테슬라도 저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노년의 테슬라가 같은 고향 출신 조각가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 지도, 메스트로비치가 어떤 마음으로 친구의 모습을 동상으로 남겼을 지도. 여전히 테슬라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조각 케이크 한 접시를 비우는 내내 그를 생각했다.'금요선빵'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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