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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푸짐한 추로스와 넉넉한 사람들금요선빵 2022. 4. 5. 08:00
: 추로스와 그라나다
재료:
밀가루,계란,
버터,
계피가루,
설탕,
소금,
물
왠지 놀이동산에서 먹어야 제 맛이 날 것 같은 음식이 있다. 추로스가 그렇다. 캐릭터 머리띠를 하고 다정한 사람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먹어야 할 것 같은 음식. 놀이동산 특유의 경쾌한 음악과 놀이기구를 탄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 소리를 배경으로 한 입 크게 배어 문다. 조금 오래된 기름 맛과 들큼한 설탕과 계피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유원지에서 파는 음식이 대게 그렇듯 특별히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맛이다.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기 전까지 나는 추로스가 솜사탕이나 핫도그처럼 그냥 놀이동산에서 으레 파는 음식인 줄 알았다. 스페인에 가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 중에 추로스가 있어 놀랐고 추로스가 스페인 전통 음식이며 주로 아침에 식사 대용이나 해장의 용도로 먹는다는 이야기에 한번 더 놀랐다. 스페인 추로스는 내가 한국에서 먹어본 추로스와 다른 음식인가 싶어 찾아보았지만 사진으로 보기에 그다지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지역마다 형태가 조금씩 달랐는데 그라나다의 추로스가 좀 모양이 독특했다. 얼핏 보면 순대인가 싶을 정도로 두툼하고 표면이 별 모양으로 올록볼록하지도 않았다. 그래, 그라나다에 가면 추로스를 꼭 먹어봐야지.
1월의 그라나다는 제법 쌀쌀했다. 바로 직전, 겨울에도 가로수로 심긴 오렌지 나무에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려 있던 도시 세비야에서 며칠을 보내고 온 후라 더 그렇게 느꼈다. 그라나다에도 오렌지 나무가 있었지만 추위에 꼬드러져 모양이 오돌오돌했다. 그라나다를 굽어보는 산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는 그 이름 그대로 만년설로 뒤덮여 하얗게 빛났다. 같은 안달루시아 지역 내에서도 이렇게 날씨 차이가 나다니, 스페인이 정말 넓은 나라라는 게 실감 났다. 숙소 주인아주머니 설명에 따르면 그라나다는 지대가 전반적으로 높아서 다른 지역보다 춥다고 했다. 그녀는 외투를 잘 챙겨 입고 다녀야 한다고 여러 번 당부한 후 열쇠를 건네주었다.
문을 연지 백 년이 넘었다는 추로스 가게는 아침부터 만원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사람들이 아침부터 추로스를 먹고 있었다. 그라나다에서 칠십 평생을 보낸 듯 보이는 할아버지들이 바 테이블에 앉아 돋보기를 끼고 느긋하게 신문을 읽으면서 추로스를 녹인 초콜릿에 찍어 먹는 중이었다. 나 같은 뜨내기 관광객이 끼어 앉아도 괜찮을 성싶은가 걱정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풍경에 살짝 긴장되었지만 빈자리에 슬며시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바 테이블에 너머로 추로스를 튀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라나다 추로스 사진을 보고 순대를 떠올린 게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었다. 딱 순대를 삶는 솥 만한 크기의 냄비에 순대처럼 둘둘 말린 추로스가 기름에 튀겨졌다. 주문이 들어가면 노릇하게 튀긴 추로스를 숭덩숭덩 썰어 접시 수북이 내었다. 접시 가득한 추로스와 걸쭉하게 녹은 초콜릿으로 한 상 받고 나니 방금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 허기가 졌다. 옆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를 따라 추로스를 집어 들어 초콜릿에 푹 찍었다.
따끈하고 달았다. 놀이동산에서 먹었던 추로스가 깃털같이 가벼운 맛이었다면 그라나다의 추로스는 다크 초콜릿처럼 묵직한 맛이었다. 양도 푸짐했다. 아침 식사로 먹는다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이렇게 추로스 한 접시를 먹고 가게를 나서면 속이 든든해서 추운 날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튀긴 음식이라 그런지 금방 물렸다. 첫 번째 가락을 먹을 때가 제일 맛있었고 두 번째 가락부터는 접시 가득 내어준 인심이 약간 버거웠다. 그래도 통통한 추로스를 차마 남길 수 없어 끝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넉넉한 추로스 접시만큼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그라나다에서 여럿 만났다. 채소 가게를 기웃거리다 검고 쭈글쭈글한 열매를 보고 대추인가 싶어 궁금하던 차, 장을 보러 온 한 할머니가 말린 올리브라며 자신의 봉지를 열어 몇 개를 맛보길 권했다. 가게 앞에 서서 할머니와 함께 말린 올리브를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진한 올리브기름 맛이 났다. 또 한 번은 길거리에서 말린 꽃을 파는 것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이게 스페인 여행을 가면 다들 사 온다는 꿀국화차인가 싶어 한참을 보고 있으니 한 할아버지가 와서는 슈퍼에서 파는 차는 비싸고 맛도 없고 이게 진짜라고 이런 걸 사야 한다고 거듭, 거듭 말했다. 그렇게 사 온 꽃차에서는 정말로 슈퍼에서 산 티백보다 진한 향이 났다.
갓 튀겨낸 추로스를 뜨겁게 녹인 초콜릿에 찍어 아침으로 먹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렇게 느긋이 아침을 먹다 보면 마음도 너그러워지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들과 함께 추로스 한 접시를 다 먹었으니 그들처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라나다를 여행하는 내내 생각했다.'금요선빵'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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