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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시공을 초월한 바게트의 기억금요선빵 2022. 3. 15. 08:00
: 바게트와 파리
재료:
밀가루,
소금,
물,
이스트
“파리”하면 거의 무조건 반사적으로 “바게트”가 떠오르는 건 아마도 유명 베이커리 프랜차이즈의 상호 탓일 게다. 그 프랜차이즈와 파리는 빵 부스러기만큼도 연관이 없겠지만 대한민국 구석구석 동네 당 하나 꼴로 자리 잡은 점포들은 한국인의 머릿속에 “파리”는 “바게트”라는 공고한 상관관계를 형성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도 그중 하나다. 통신사 할인과 해피 포인트를 꼬박꼬박 적립할 때마다 언젠가 파리에 간다면 진짜 “파리 바게트”를 먹어 보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로 파리에 가게 되었다. 진정한 “파리 바게트”를 맛볼 생각에 빵순이의 마음은 정월 초하루 바람에 띄운 연 마냥 날뛰었다. 모처럼 온 기회를 함부로 날릴 순 없기에 파리에서 가장 맛있는 바게트를 만드는 빵집을 검색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파리 시는 1994년부터 일 년에 한 번, 파리에서 제일가는 바게트를 뽑는 대회(Grand prix de la baguette de tradition française de la ville de Paris)를 개최한다. 우승자는 상금과 일 년 동안 엘리제 궁에 바게트를 납품하는 영예를 얻는다. 방문 일자를 기준으로 가장 최근 1등을 차지한 빵집을 찾아 구글 맵에 저장했다.
빵집은 파리 6구 어느 골목에 있었다. 주변에 딱히 가볼 만한 관광지도 없고 숙소에서 가깝지도 않았지만 오직 맛있는 바게트를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스를 타고 낯선 동네로 향했다. 가게 외관은 평범했다. 창문에 1등 바게트 수상을 알리는 스티커가 붙어 있긴 했는데 차양에 가려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가게 안은 적당히 붐볐고 바게트 말고도 다양한 빵이 진열되어 있었다. 조금 고민하다 바게트 두 덩이를 샀다.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좀 더 길었다. 점원은 바게트 각각을 길쭉한 흰색 종이봉투에 담은 후 둘을 모아 한꺼번에 작은 종이봉투에 담은 후 건네주었다.
종이로 포장한 기다란 바게트 두 개를 품에 안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오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날씨가 쌀쌀했는데도 빵에서 나온 온기가 외투를 뚫고 훈훈하게 전해져 왔다. 자리에 앉자 어디 선가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종이봉투에 코를 박았다. 바게트 냄새였다. 세상에. 잘 지은 쌀밥에서 맛있는 밥 냄새가 나듯 잘 만든 바게트에서도 바게트 냄새가 난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40분 남짓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무척이나 길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바게트를 숭덩숭덩 썰었다. 바삭하고 단단한 빵 겉면을 자르자 구멍이 송송한 폭신한 속살이 드러났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진하게 올라왔다. 지금까지 난 뭘 먹었던 걸까. 윌리 로니스의 사진 『어린 파리지앵 (Le petit Parisien, 1952)』에서 자기 키 만한 바게트를 들고 달려가던 소년이 지은 함박웃음의 의미를 단박에 알 것 같았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맛. 품에 안으면 신나게 달려갈 수밖에 없는 맛.
이날 먹은 바게트는 바게트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버렸는데 기쁘고도 슬픈 일이었다. 좋게 말하면 담백한 빵, 나쁘게 말하면 무색무취한 빵이었던 바게트가 사실은 끝내 주는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 “끝내 주는” 바게트를 다시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 바게트를 씹을 때면 그날 파리에서 먹었던 바게트 냄새와 맛을 떠올렸다. 새로운 가게에서 바게트를 살 때마다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바게트는 밀가루에 소금과 물, 이스트를 넣고 만든다. 특별할 것 없는 재료에서 특별한 맛과 향을 건져 올리는 건 만드는 이의 정성일 테다. 그날그날, 습도와 온도에 따라 밀가루 반죽에 넣는 물과 이스트의 양,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조절하고 오븐의 온도와 굽는 시간을 맞춘다. 적당히 발효될 때까지 기다리고 반죽을 빚고 모양을 잡아 굽는 일. 해보지 않아도 어렵고 성가신 작업일 것 같다. 몇 줄 되지 않는 바게트 레시피는 빵 굽는 이의 인생을 담아야 완성되는 모양이다.
강렬했던 바게트 냄새가 기억에서 옅어질 때 즈음 뜻밖의 장소에서 파리의 바게트에 버금가는 바게트를 만났다. 어느 책 출간 기념행사에서였다. 시멘트 회사 영업직을 그만두고 불현듯 빵을 굽게 되었다는 분이 쓴 수필집이었는데 출판사가 출간 행사를 글쓴이의 빵집에서 열었다. 이태원 어느 골목 지하에 자리한 빵집은 작가가 인심 좋게 준비한 빵으로 넉넉했다. 조곤조곤 말씀을 이어가시는 모습이 절에서 법문을 하는 스님을 닮아 있었다. 한 가지 일에 정진하는 사람의 얼굴은 모두 저리 닮는가 싶었다.
행사가 끝날 무렵, 참석자 모두에게 바게트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가게에서 판매하는 것은 아니고 평소 바게트를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던 글쓴이의 지인이 외국으로 떠나기 전 생에 처음으로 만든 바게트라고 했다. 바게트 모양에 꼭 맞도록 길쭉하게 생긴 에코백에 바게트가 포장되어 있었다. 건네받은 가방을 뚫고 구수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경기도 광역 버스가 파리의 시내버스로 변하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정성 가득한 바게트를 두고 며칠을 배불리 먹었다.'금요선빵'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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