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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 옅어지는 기억, 짙어지는 레몬 마들렌의 맛
    금요선빵 2022. 3.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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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들렌과 파리 오일장

    재료:
    달걀, 

    설탕, 

    박력분, 

    베이킹파우더, 

    무염버터
    레몬즙, 코코아 가루 등을 취향에 따라 첨가 가능

     


    파리에 열흘을 있었다. 뮤지엄 패스 일주일 권을 야무지게 쓰며 성실한 관광객의 자세로 도시를 누볐다. 가보고 싶었던 곳을 얼추 다 돌아보고 나니 그제야 파리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출퇴근 시간에는 교통 체증에 시달리고, 친구들과 학교에 가고, 이웃과 함께 장을 보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파리에도 있었다. 이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파리에서 오일장을 발견한 건 여행자가 으레 가지게 되는 들뜬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숙소 근처를 지나는 시내버스의 루트가 친숙해질 즈음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며 창 밖을 내다보다 어제까지만 해도 공터였던 곳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걸 보았다. 얼기설기 세워진 천막 사이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시장이네! 오일장 열었는 갑다.”


    엄마의 눈은 예리했다. 정말 시장이었다. 천막 아래에 좌판이 깔려 있었는데 각종 과일과 채소, 생선 같은 식자재부터 라비올리나 피자 같은 먹거리, 식탁을 장식할 꽃까지 다양한 물건이 판매 중이었다. 파리에서 오일장이라니. 어딘지 인지부조화가 일어날 것 같은 조합이었지만 생각해보면 파리 같은 대도시에 시장이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박물관과 명품거리만으로 도시가 굴러가는 건 아닐 테니까. 


    뜻밖에 본격 시장 구경을 나섰다. 엄마는 손짓 하나로 마치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고르듯 고등어를 골라 장만을 요청했는데 생선 가게 아저씨는 그걸 또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고등어의 머리를 처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해 굽기 좋은 모양으로 장만해 주셨다. 그 모든 과정을 보고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미처 내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파리에 살아도 되겠다며 즐거워하는 엄마를 옆에 두고 나는 웃기면서도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동안 영어 공부에 힘쓰며 보낸 시간과 노력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렵게 익힌 영어는 영어권 국가가 아니면 아무 쓸모가 없으며, 어쭙잖게 익힌 언어보다는 순발력을 동원한 바디랭귀지가 더욱 유용하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하고 의문의 1패를 당한 기분에 조금 씁쓸했다. 


    쓰린 마음을 달래는 찰나, 달콤한 향기가 은은하게 바람에 실려 왔다. 생선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들렌을 팔고 있었다. 내 손바닥만한 마들렌이 작은 좌판에 열을 지워 누워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마들렌보다 크기도 약간 더 크고 두께도 조금 더 두툼했다. 향도 모양도 좋고 맛도 궁금해서 종이봉투 가득 마들렌을 샀다. 인심 좋은 주인은 덤으로 마들렌 하나를 얹어 주었다. 이쯤 되니 시장에는 시장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왼손에는 고등어 한 손을 오른손에는 마들렌 봉투를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한입 베어 물자 입안 가득 레몬향이 퍼졌다. 겨울의 파리는 연일 강풍에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외출을 하고 오면 몸을 잔뜩 웅크린 탓에 어깨가 결리곤 했는데 마들렌 한 입에 온몸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잘 익은 레몬에서 나는 달큼한 신맛과 설탕의 단맛이 마들렌에 한가득 묻어났다. 적당히 구워 속은 퍽퍽하지 않고 촉촉하고 겉은 적당히 바삭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라뒤레의 마카롱보다 파리 시장의 마들렌이 더 맛있었다. 가격도 훨씬 저렴했다. 


    몇 달 전 마들렌 틀을 샀다. 빵집에서 마들렌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사려다 가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기 때문이다. 이럴 거면 만들어 먹지 싶어 마들렌 틀을 검색했는데 생각보다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거의 원형에 가까운 조개껍데기 모양부터 내 손보다 더 큰 크기의 대형 마들렌 틀까지 각양각색의 마들렌 틀에 마음이 잠시 혼란했지만 가장 클래식한 모양의 마들렌 틀을 골랐다.


    밀가루를 체에 쳐 내린 후 달걀과 설탕,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섞다가 말랑하게 녹은 버터를 넣고 잘 휘젓는다. 취향에 따라 레몬 제스트나 코코아 가루, 녹차 가루 등을 추가할 수도 있고 섞기가 끝나면 반죽을 냉장실에 잠시 둔다. 마들렌 틀에는 녹인 버터를 골고루 바른 후 냉장고에서 휴지 한 반죽을 80% 정도 채운다. 이때 보통 짤주머니를 쓰는데 나는 짤주머니가 없기도 하고 반죽을 주머니에 넣고 나중에 주머니를 버리는 게 번거로워서 그냥 숟가락으로 반죽을 퍼서 넣는다. 반죽을 채운 틀을 오븐에 넣고 굽는데 레시피에서 제안하는 온도나 시간이 우리 집 오븐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수시로 오븐을 들여다보며 마들렌 배꼽이 잘 부풀어 오르는지, 겉이 타지는 않는지 확인한다. 때론 너무 익어 겉이 약간 타거나 버터를 적게 넣어 퍽퍽하기도 하지만 틀 덕분에 모양 하나는 늘 그럴싸하다. 


    다시 파리에 간다면 그 마들렌을 먹을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이었는지 시장과 마들렌 모두 사진 한 장 남겨두지 않았다. 지도를 아무리 봐도 시장이 열렸던 곳이 어디였는지 모르겠다. 희뿌예진 기억 사이로 달달한 레몬향만 점점 짙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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