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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요알람 27. 건반 88개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요알람 2021. 10. 29. 08:00

    #피아노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

    다정한 구독자님께

    안녕하세요. 큐레이터 Q입니다.
    지난주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막을 내렸습니다. 6년 전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우승해 화제가 되기도 했죠. 원래 5년마다 열리는데 코로나19로 1년 연기되어 올해 열렸습니다. 유튜브로 대회를 실황 중계했는데요, 저는 나중에 파이널 영상만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와 폴란드는 시차가 7시간이라 라이브는 보기 어렵더라고요.

    오랜만에 쇼팽의 피아노 곡을 들으며 즐거운 한주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언제가 좋을까 고민하며 묵혀둔 피아노 영화를 꺼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가을은 피아노 연주를 듣기 딱 좋은 계절이니까요.


    피아노 (1993)

    언어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그다지 유용한 매체가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 모두가 언어로 미처 전하지 못한 감정을 전하기 위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혀끝에서 맴돌다 끝내 발화하지 못한 감정을 어떻게든 전달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일지도요.

    에이다(홀리 헌터 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문을 닫고 살아왔습니다. 대신 피아노를 쳤어요. 에이다에게 피아노는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언어이자 자신의 분신과 같았죠. 아, 그녀의 귀여운 딸 플로라(안나 파킨 분)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플로라는 에이다의 수어를 다른 사람에게 번역하는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거든요.

    아버지의 명령으로 결혼을 위해 뉴질랜드에 도착한 에이다. 해변에서 거센 파도를 맞으며 하루 밤을 지새우고서야 남편 될 사람을 만납니다. 짐을 옮기면서 남편은 피아노를 그냥 내버려 둡니다. 땅이 질퍽해 이동이 어렵고 일손도 부족하다는 이유로요. 피아노가 에이다에게 어떤 의미인지 남편은 알지 못하는 걸까요, 알고 싶지 않을 걸까요?

    에이다의 대사 대신 영화 내내 반복되는 메인 테마 음악은 마이클 나이먼이 작곡했습니다. 그는 『가타카』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는데요, 둘의 음악을 나란히 비교해보니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오늘 소개하는 영화 중에서 『피아노』는 유일하게 오리지널 스코어를 사용했습니다.

    감독 : 제인 캠피온
    러닝타임 : 2시간 1분
    Stream on Watcha

    피아니스트 (2001)

    정말 좋은 줄 머리로는 알겠는데 막상 남에게 권하기 망설여지는 영화가 있습니다. 내 소개로 영화를 본 지인이 흔들리는 동공과 불안한 눈빛으로 저를 볼까 봐요. 아니, 다시는 보지 않을까봐가 더 정확하겠습니다. 그래서 평론가의 권위에 살짝 기대어 봅니다. 이 영화, 이동진 평론가가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다섯 개를 주었습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클래식 음악으로 가득하지만 음악 영화가 아니며 남녀가 만나지만 로맨스 영화도 아닙니다. 대신 비뚤어진 집착과 뒤틀린 욕망과 파국으로 치닫는 불안정한 관계가 있을 뿐이지요.

    에리카(이자벨 위페르 분)는 명망 있는 피아노 교수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굉장히 어긋나 있음을 영화가 시작하고 거의 바로 알 수 있죠. 에리카의 엄마는 마흔이 넘은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에리카는 그런 엄마를 증오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느 날 그녀에게 저돌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어린 남자(브누아 마지멜 분)가 나타나고 에리카는 숨겨왔던 욕망을 조금씩 내보입니다.

    영화에는 슈베르트 음악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에리카가 슈베르트 전문가이기 때문이죠. 피아노 소나타 (No 22, D 959) 2악장과 피아노 트리오 (No. 2, D. 929) 2악장은 평소에도 좋아하던 음악이라 영화에서 만나니 더 반갑더라고요. 슈베르트의 음악이 영롱하게 들리는 걸 보니 겨울이 성큼 다가왔나 봅니다.

    감독 : 미카엘 하네케
    러닝타임 : 2시간 10분
    Stream on Watcha

    피아니스트 (2002)

    쇼팽의 녹턴 20번이 흐르고 1939년 나치가 들이닥친 폴란드 바르샤바의 흑백 영상이 스산하게 지나갑니다. 피아니스트 슈필만(애드리안 브로디 분)은 방송국에서 같은 음악을 연주하다 독일의 공습을 받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죠. 나치의 억압과 횡포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지고 유대인들은 게토 안에 고립되어 생존을 위협받습니다.

    영화는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는 폴란드인이자 유대인이었고 참혹했던 세계 2차 대전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겼습니다. 폴란스키 감독은 여기에 자신의 경험을 섞어 영화로 만들었어요.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는 볼 때마다 양가적인 마음이 들어 마음이 혼란합니다. 아동 성범죄자의 추악함과 쉬이 외면할 수 없는 작품 사이에서 쉴 새 없이 갈팡질팡하곤 말아요. 차라리 영화를 못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는 쇼팽의 음악과 함께합니다. 쇼팽이 폴란드 사람인 것도 무관하지 않겠지요. 이 영화의 OST 마지막 트랙은 스필만이 연주한 마주르카 4번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산 쇼팽 앨범이 바로 이 영화의 OST 앨범이었어요. 앨범 자켓에 우수에 찬 얼굴의 애드리안 브로디 사진이 있어 저는 요즘도 쇼팽의 피아노곡을 들을 때마다 그 얼굴을 떠올린답니다.

    감독 : 로만 폴란스키
    러닝타임 : 2시간 30분
    Stream on Watcha & Neflix


    덧붙이는 이야기

    올해로 18번째를 맞는 쇼팽 콩쿠르는 캐나다 피아니스트 브루스 리우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앞으로 그가 어떤 음악을 선보일지 궁금하고 기대되네요.

    쇼팽 협회(Chopin Institute)는 콩쿠르의 거의 전 과정을 유튜브로 중계해 수많은 클래식 팬들이 잠을 설치게 만들었어요. 예선부터 모두 챙겨보며 누가 우승할지 점쳐보는 사람도 있던데 제 귀에는 다들 잘 치는 걸로 들려서... 저렇게 연주하려면 얼마나 지독하게 연습에 몰두해야 했을까 짐작해보다가 긴 시간 객석을 지키고 있는 폴란드 사람들의 지구력과 인내력에 감탄하곤 했습니다. 유튜브에서 "Chopin Institute"를 검색하시면 다양한 영상을 볼 수 있어요. 조성진 피아니스트도 깜짝 등장한답니다.


    이번 주에 소개드린 영화는 모두 칸 영화제와 인연이 깊어요. 『피아노』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는 황금종려상을,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는 그랑프리와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피아노와 함께 행복한 가을날 보내시고요, 구독자님의 마음을 움직인 음악은 무엇이었는지 저에게도 살짝 알려주시어요.

    다음 편지에서 또 만나요.
    당신의 큐레이터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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