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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알람 25. 지루하고 아름다운금요알람 2021. 10. 15. 08:00
#토리노의 말 #영원과 하루 #솔라리스
다정한 구독자님께
안녕하세요. 큐레이터 Q입니다.
주기적으로 넷플릭스나 왓챠의 스트리밍 서비스 종료 예정작을 찾아봅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영화를 얼른 챙겨 보려고요. 며칠 전에 그 리스트에서 한 영화 제목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가 디스토피아였으니까 이번엔 뭔가 가볍고 상큼한 걸 고르려 한 원래 계획은 잠시 미루었어요.
이번 주에 소개하는 영화의 감독들은 하나같이 롱테이크가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그것도 한 테이크 안에 공간의 이동이 거의 없는 아주 아주 정적인 롱테이크지요. 주말 오후, 끝없이 이어지는 롱테이크를 보다 꾸벅꾸벅 졸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고백하자면 저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그 지루함을 살짝 비껴가면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 아름다움을 구독자님과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토리노의 말 (2011)
가수 김연자의 노래로 유명한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라틴어 이죠.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EDM 비트가 떠오르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되지만 사실 이 말은 "영원 회귀"를 설파했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에서 왔습니다. "신은 죽었다"는 문장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 유명하지요.
갑자기 왜 철학자 이야기냐고요? 이 영화의 제목 『토리노의 말』이 니체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중년의 니체는 십 년 동안 유럽을 떠돌다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마부가 말을 채찍질하는 걸 보고는 말의 목을 껴안고 오열합니다. 그리고 미쳐버립니다. 니체는 그 후 조용히 정신을 놓은 채 십 년 동안 가족의 보살핌을 받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헝가리 영화감독 벨라 타르는 니체의 일화에 등장한 말과 마부, 그리고 마부의 딸의 일상을 그립니다. 흑백 필름 영상 위로 거친 바람이 끝없이 불고 마른 흙이 흩날립니다. 대사도 없이 감자 먹는 노인을 클로즈업한 채 압도적으로 지루하게 이어지는 롱테이크를 보고 있노라면 이게 무슨 영화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이상하게도 영화의 잔상이 보고 나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짙어졌어요.
감독 : 벨라 타르
러닝타임 : 2시간 35분
Stream on Watcha
영원과 하루 (1998)
전 이 영화를 영화보다 음악으로 먼저 접했습니다. ECM 레코드의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다 우연히 강아지와 함께 항구를 산책하는 노인의 사진을 발견했거든요. 영원과 하루라는 앨범 제목도 인상적이었고 작곡가 엘레니 카라인드로우가 그리스 출신이라고 해서 더욱 호기심이 동했습니다. 평소에 그리스 음악을 들을 일이 잘 없잖아요.
음악은 원래 영화 『영원과 하루』의 OST였는데 감독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도 그리스 사람이었어요. 그리스 영화 역시 흔히 볼 수 있지 않으니까 언제 한번 보아야지 했습니다. 그런데 감독이 칸과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에서 골고루 상을 받았더라고요. 잠시 주저했습니다. 보통 유명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영화는 난해하거나 지루했거든요. 더구나 앙겔로플로스 감독은 '롱테이크'의 거장으로 불렸고, 주인공 배우 브루노 간츠는 제가 몇 번이나 보려다 실패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음악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어요. 카라인드로우의 음악은 정말이지 아름다웠거든요. 그래서 영화는 어땠냐고요? 저는 구독자님의 감상이 궁금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세 편의 영화 중 가장 짧기도 하니까 직접 확인해 보세요. 죽음을 눈앞에 둔 노년의 시인이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느릿느릿 카라인드로우의 음악을 벗 삼아 그리스 해변을 함께 걸어봅시다.
감독 :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
러닝타임 : 2시간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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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197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러시아가 소련이었던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몽환적인 롱테이크 신이 감독의 특기라 "영상시인", "시네아티스트"라 불립니다. 재능 넘치는 감독이었지만 소련 당국의 입맛에 반하는 영화를 만드는 바람에 번번이 활동에 제동이 걸리곤 했다고 해요. 결국 그는 망명하여 54살의 이른 나이에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화는 혹성 "솔라리스" 근처에 있던 우주 정거장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을 다룹니다. 동명의 SF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가 미국과 러시아가 냉전을 치르며 우주를 누가 먼저 정복할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던 때라 괜스레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지만 영화에 그런 정치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대신 자아가 있는 듯 보이는 혹성 솔라리스와 우주정거장에서 미쳐가는 과학자들과, 죽은 아내의 망령인지 외계인인지 모를 무언가를 만나는 과학자 켈빈의 슬픈 이야기가 잔잔히 흐를 뿐입니다.
영화 신 하나하나가 캡처해서 바탕화면으로 해두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서 마치 사진전을 감상하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이야기의 전개도, 카메라 워킹도 정적이고 느려서 더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와 함께 타르코프스키의 롱테이크 속을 산책해 보시겠어요?
감독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러닝타임 : 2시간 47분
Stream on Watcha
덧붙이는 이야기
Async (2017)
- 류이치 사카모토
제가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를 본 건 순전히 이 앨범 때문이었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가상적인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사운드 트랙'이라는 컨셉으로 작업했다"라고 말했거든요. 대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누구길래 사카모토가 있지도 않은 영화의 사운드 트랙을 만드려 한 걸까 알고 싶었습니다.
후두암 진단을 받고 그는 그동안 준비했던 작업물을 모두 치워버리고 정말로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이 무엇인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너무 좋아서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결과물이 이 앨범입니다. 발매 당시 "Life, life"라는 전시가 있기도 했어요. 지루하고 아름다운 롱테이크 신에 소리가 있다면 바로 이 음악일 겁니다.
"뭔 내용이고?" 영화를 함께 본 엄마의 감상평이었습니다. 직관적으로 다가오진 않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곱씹고 생각하게 되는 게 오늘 소개한 영화의 매력이자 영화가 위대한 예술로 추앙받는 이유이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다음 편지에서 또 만나요.
당신의 큐레이터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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