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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알람 21. 알모도바르의 빨강금요알람 2021. 9. 17. 12:00
#귀향 #브로큰 임브레이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Querido/Querida Reader:
안녕하세요. 큐레이터 Q입니다.
구독자님은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적이 있나요? 저는 종종 그러곤 합니다. 어느 날 인테리어 소품을 골라 잔뜩 담아둔 장바구니를 살펴보니 죄다 빨강이더라고요. 그때서야 "아, 내가 빨간색을 좋아하는구나."라고 깨달았어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감독도 그랬습니다. 강렬한 붉은색을 곁들여 파격적인 소재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감독의 솜씨에 푹 빠져서 하나, 둘 챙겨보다 보니 어느새 그가 만든 거의 모든 영화를 보고 말았어요. 구독자님도 추석 연휴 동안 알모도바르의 빨강에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귀향 (2006)
"하얗게 바랜 시간에 이마는 주름지고
머리털도 회색이 되었지만 느낄 수 있네
삶이란 순간에 불과하단 걸."
영화는 묘지에서 묘비를 닦는 여자들의 이미지로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석이면 성묘를 가잖아요. 스페인에도 아마 비슷한 풍습이 있나 봅니다.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분)는 그녀들과 함께 죽은 엄마의 묘비를 닦습니다. 비록 화재 사고로 돌아가시긴 했지만 사랑하는 아버지 품에 안겨 생을 마감한 엄마는 복된 사람이라고 회상하면서요. 성묘를 마치고 동생과 사춘기 딸과 함께 혼자 사는 이모 댁에 들린 라이문다는 나이를 먹어 앞도 잘 보이지 않고 거동도 불편한 이모가 죽은 엄마를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걸 보고 걱정에 휩싸입니다.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고, 살림도 꾸려가며 라이문다는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갑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요. 사춘기 딸을 쳐다보는 남편의 눈에서 이상함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라이문다의 엄마와 라이문다, 라이문다와 라이문다의 딸로 이어지는 모녀관계는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소용돌이칩니다.
알모도바르는 집요할 정도로 장면 장면에 빨강을 얹습니다. 빨간 자동차, 빨간색 옷, 토마토, 그리고 선혈. 빨강이 주는 이미지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도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즐기는 색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러닝타임 : 2시간 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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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임브레이스 (2009)
"이름이 뭐예요?" "해리 케인."
"내 본명은 마테오. 난 영화감독이었다."
본명인 마테오를 두고 해리 케인이라는 이름으로 극작가로 활동 중인 이 남자(루이스 호마르 분)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지극히 챙기는 매니저 주디트와 그의 아들 디에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글을 쓰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며 평안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업가 에르네스토 마르텔의 죽음을 뉴스로 전해 듣고 거의 동시에 에르네스토 마르텔의 아들이 그를 찾아와 서랍 속에 묻어 두었던 과거를 들추기 전까지는요.
영화 포스터 속 여인의 이름은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분)입니다. 해리 케인이 마테오이던 시절, 두 눈으로 세상을 보며 영화를 만들던 시절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했던 배우이지요. 짧게 자른 앞머리, 경쾌하게 묶은 포니 테일을 보고 저는 오드리 헵번을 떠올렸습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녀가 왜 부서진 포옹(Los abrazos rotos, Broken embraces)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붉게 물든 알모도바르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보아요.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러닝타임 : 2시간 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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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1988)
"날 둘러싼 세계가 무너졌기에 세상과 날 구하고 싶었다."
콜라주로 이루어진 오프닝은 삼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 보아도 굉장히 세련되고 감각적입니다. 과한 이미지는 시간이 흘러 다시 보면 촌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알모도바르의 미술은 과한 것 같으면서도 촌스럽지가 않아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통통 튀는 이야기가 어디로 뛸지 알 수 없고 "아니 이게 가능해?"라고 폭소가 나오기도 하지만 날것 그대로인 강렬함이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지금은 중후한 중년 배우가 되어 있는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귀향에 출연했던 카르멘 마우라의 젊은 시절 모습도 만날 수 있어요.
앞서 소개한 영화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마테오가 만들던 영화 "소녀와 가방"은 이 영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경안정제를 잔뜩 넣고 갈아 만든 가스파초나 불타버린 침대를 보고 굉장히 반가웠어요.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오프닝을 유심히 보면 "El Deseo"라는 제작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알모도바르 감독이 그의 동생 아구스틴 알모도바르와 함께 만든 제작사인데 한국어로 "욕망"이라는 뜻이에요. 제작사 이름이 욕망이라니 참으로 알모도바르 답지 않습니까!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러닝타임 : 1시간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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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이야기
작곡가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와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모도바르 감독은 한번 만난 사람과 굉장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영화에 등장했던 배우는 다음 영화, 그다음 영화에서 다시 등장해 마치 "알모도바르 유니버스"가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죠.
이는 그의 영화 음악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작곡가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업 목록을 나란히 놓고 보면 거의 같은 사람의 것을 보는 것 같아요.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이글레시아스 특유의 멜랑콜리하지만 어딘가 불안함을 자극하는 멜로디가 들리지 않으면 알모도바르 영화가 알모도바르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을 지경입니다.
저는 "그녀에게(2002)", "내가 사는 피부(2011)"와 "패인 앤 글로리(2019)" 이렇게 세 작품의 음악을 특히 좋아합니다. 패인 앤 글로리는 칸 영화제에서 사운드 트랙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했어요. 제가 기타 선율을 좋아하는지도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을 듣고 깨달았어요. 어쩌면 인생은 평생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편지에서 또 만나요.
Un abrazo, 당신의 큐레이터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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