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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찬 5. 잃어버린 재미를 찾아서금요예찬 2021. 10. 5. 12:00
*스포일러 경고: 오징어 게임의 내용과 결말 일부를 담고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린다. 미세먼지가 심하거나 겨울이 아니면 창문을 늘 열어 두는데 우리 집은 거실 창이 아파트 놀이터 쪽으로 나 있어 언제나 아이 소리가 난다. 목소리가 커지면 자신의 주장도 더욱 커진다고 믿는지 아이들은 목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그때마다 나는 천적을 만나면 몸을 잔뜩 부풀려 자신을 보호하는 복어나 목도리 도마뱀이 떠올라 몰래 웃는다. 공사장에서 나는 소음은 조금만 들어도 무척 괴로운 반면 아이들이 노는 소리는 하루 종일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아 신기하다. 즐거움으로 가득한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도 밝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낮 내내, 때로는 해가 진 저녁까지 쉴 새 없이 분주하게 떠들고 노는 아이들은 무척이나 신나 보인다. (물론 그 안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윤가은 감독이 영화 『우리들(2015)』에서 예민하게 포착했듯 다층적인 갈등과 비극이 있겠지만 말이다.) 매일 어쩜 저리 지치지도 않는지, 무얼 하며 놀길래 그리 즐거운지 궁금하고 종종 부럽다. 나의 매일은 저렇게 신나고 즐겁지 않은데. 나도 한때는 저렇게 매일매일을 보냈을 텐데.
매일 어쩜 저리 지치지도 않는지, 무얼 하며 놀길래 그리 즐거운지 궁금하고 종종 부럽다. 나의 매일은 저렇게 신나고 즐겁지 않은데. 나도 한때는 저렇게 매일매일을 보냈을 텐데.
어른의 일상이란 자못 그런 것인지 정신없이 바쁘거나 아무 일 없이 권태롭거나를 널뛰듯 오간다. 재미있으면 그만 아닌가 기세 좋게 외치다 가도 밥벌이의 무게가 엄습해오면 그저 고개를 숙이고 만다. “요즘 사는 게 재미가 없어.”라고 말하는 동료에게 “사는 게 별 건가. 별일 없는 게 제일 좋은 거야.”라고 답하면서도 어딘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건 지금은 희미해진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머리에 땀을 뻘뻘 흘리며 신나게 뛰놀았던 아스라한 기억 말이다.
황동혁 감독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은 아이 놀이를 가져와 목숨을 건 게임 소재로 사용한다. 첫 번째 게임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사전에 이 드라마가 생존 게임이 주된 내용이라는 걸 알고 봤는데도 첫 번째 탈락자가 발생했을 때 무척 놀랐다. 머릿속으로 막연히 짐작했던 ‘탈락’의 실체가 총성과 선혈이 낭자한 이미지로 구현되며 발생한 충격은 즉각적이고 말초적이었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드라마 속 설정에 적응하고 과연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지, 어떤 반전이 있을지 기대하며 9개의 에피소드를 빠르게 훑었다. 이런저런 레퍼런스를 떠올리고 미술팀의 연출과 적절한 음악에 감탄하며 드라마를 제법 즐겼다. 마냥 이 이야기를 즐기는 일이 괜찮은 건지 아닌지, 마음 한 구석에서 빨간 사이렌이 자꾸만 깜빡이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마냥 이 이야기를 즐기는 일이 괜찮은 건지 아닌지,
마음 한 구석에서 빨간 사이렌이 자꾸만 깜빡이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일상에서 재미가 줄어들기 시작한 때는 이런저런 자극적 연출에 익숙해진 때와 비슷하게 겹치는 것 같다. 20년 전 교실에서 친구들과 『배틀로얄(2000)』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잔인한 설정과 묘사에 진저리 치며 화면에서 눈을 돌렸지만 2021년의 나는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장면에서는 잠시 움찔하고 만다. 용인할 수 있는 자극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사소한 재미를 즐기는 감각은 무디어진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영화를 원하면 내키는 대로 고르고 그럭저럭 비위가 상하지 않으며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치른 것이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감각이라면 너무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 억울한 마음이 든다.
『오징어 게임』에서 왜 이런 게임을 만들었냐는 기훈의 질문에 주최자는 “재미” 때문이라고 답한다. 어느 순간 사는 게 지루해져서, 그저 재미있으려고 사람들을 모아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고. 그의 섬찟한 대답에 말문이 막히면서도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도 그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이니까, 드라마 설정이니까, 다들 재미있다고 하니까. 그러면서 어디선가 울리는 빨간 사이렌을 연거푸 무시할 때마다 무언가 소중한 걸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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